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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writer : 박민희 (mhpark) date : 2007-11-05 08:59:48 hit:2923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와 의(義)를 의지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둘째 아들의 돌이킴

사람들이 신앙의 세계를 정확히 알지 못할 때,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성하고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실 줄로 믿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자기 선을 의지하지, 하나님의 의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의지했다.

‘내가 나가서 사업을 하면 잘 될 거야. 나는 똑똑해. 지난번에 이렇게 일했을 때 잘 되었어.’

그렇게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재산을 달라고 할 수 있었고,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방탕하게 살 수 있었다. 자기를 믿는 마음에서 교만이 일어나고 방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그 마음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망해 가는데, 결국 돼지우리에 내려가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그가 자기 자신을 깨달았다.

둘째 아들은 그 전까지 돼지우리에서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일하면 주인이 좋아해서 음식을 더 줄지 몰라. 그러면 일을 더 열심히 해서 돈을 모을 수 있고, 그렇게 돈을 모으면 잘살 수 있을 거야.’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런데 점점 더 배가 고파 오고, 나중에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그때 둘째 아들이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달았다.

‘내가 나를 믿은 결과는 주려 죽는 것이구나! 여기 있다가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구나!’

자기를 믿은 결과를 정확히 아니까, 둘째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거나 자기 방법을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깨닫고 나니까, 먼 나라에서 주려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방법이 바뀌면서 자기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데에서 하나님께 기대를 두고 아버지를 바라는 곳으로 둘째 아들의 마음이 돌아서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믿는데, 자신이 행한 것으로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방법에 기대를 두는 것이다.


라합과 노아의 돌이킴

기생 라합은 여리고에서 정탐꾼을 숨겼다. 물론 정탐꾼을 숨기는 것은 모험이다. 숨겼다가 정탐꾼들이 잡히면 자기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 라합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오면 여리고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라합은 더 이상 여리고에 기대를 두지 않았다. 여리고에 기대를 두었다가는 결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라합은 정탐꾼을 숨겼던 것이다. 위험하고 어렵지만, 그 쪽으로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은 회개를 거치면 그때부터 너무 편해진다. 회개란 “내가 도둑질했습니다. 간음했습니다. 살인했습니다.” 하고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 동안 살아온 자신을 보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결과는 죄악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나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살면 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발견하는 것이다.

노아 홍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비웃고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 노아는 왜 그들과 달리 방주를 만들었는가? 그는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너무 많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려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가 살아남겠는가? 우리는 멸망받을 수밖에 없어!’ 하고 노아는 정확하게 알았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신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을 때,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 노아가 그 말씀을 듣고 ‘아, 그렇네! 방주를 만들면 되겠네!’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방주 만드는 것이 어렵고 부담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방주를 만드는 일에는 노아에게도 많은 부담이 있었다. ‘이 큰 방주를 어떻게 만들지? 나무는 어떻게 베어내지? 이 나무를 어떻게 톱으로 켜지?’ 그러나 노아는 현재 자기가 처한 상황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담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방주를 만들기 위하여 나무를 베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자기를 믿는 바리새인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기 전에는 막연하게 자기를 믿는다. ‘내가 이렇게 하면 되겠지. 좀더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하고 노력하면 내 죄를 씻을 수 있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지.’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실제 우리 삶은, 우리는 다 죄의 자손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는 늘 죄악이 솟아난다. 우리는 근본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멸망을 받기로 작정된 여리고 사람과 같은 것이다.

라합은 자기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여리고를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에서 온 정탐꾼에게 기대와 소망을 둘 수 있었다. 노아는 자신이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주를 만드는 일이 어려워도 그것을 할 수 있었다.

바리새인은 아직까지도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자기가 잘한 것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가 십일조를 내고 금식을 하고 선을 행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십일조를 내어도 더러운 죄인이 십일조를 내는 것이고, 금식을 해도 더러운 죄인이 금식을 하는 것이며, 율법을 지켜도 더러운 죄인이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께 충성해도 더러운 죄인이 충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나라는 존재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이란 이제 나에게서 벗어나 나로 말미암지 않은 다른 의(義)를 얻는 것이다. 내가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행한 선이나 의 말고, 나 밖에 있는 다른 선, 다른 거룩함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자기를 믿기 때문에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는 기능이 없었다.


자신을 발견한 세리의 기도

세리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어. 나는 죄가 너무 많고, 아무리 선을 행하려고 해도 되지 않아. 나는 이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바리새인만 선한 일을 하고, 세리는 선한 일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선만 행하기도 어렵지만 악만 행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분명히 세리도 선을 행했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세리 사이에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바리새인도 죄를 지었을 것이고 세리도 죄를 지었을 것이며, 바리새인도 선을 행했을 것이고 세리도 선을 조금 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기를 믿기 때문에 자기가 행한 선을 하나님이 인정하고 받으실 줄로 믿었고,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발견하고 보니까 자신이 행한 선이 무익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리는 십일조를 내 보았지만 그것이 자기 죄를 씻지 못하고, 금식기도를 해 보았지만 그것으로도 죄를 씻을 수 없으며, 자기가 노력하고 애써 보았지만 그것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행한 것 가지고는 안 돼!’

바리새인은 자기가 행한 선이 가치가 있는 줄로 알았지만, 세리는 자기가 행한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참으로 깨달았기에, 그는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세리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이켰고, 기생 라합은 여리고 왕을 의지했다가 이스라엘에게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마음이 정탐꾼에게로 옮겨갔으며, 노아는 자기 노력으로 선을 행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인 방주를 만들었고, 세리는 자기 선과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께만 기대를 가졌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그 세리에게 의를 주셨다. 그가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내 행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리처럼 내 행위가 다 추하고 더러운 것을 깨달아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의를 입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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